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동산 가격 버블의 해외 사례 미국 일본
    부동산 관련 지식들 2020. 4. 7. 16:18

    부동산 가격 버블의 국내 또는 해외 사례

     

    미국 플로리다 부동산 버블

    플로리다 버블의 출발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작됩니다. 당시 미국은 번영시대를 구가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휴가 등 레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답니다. 여기에 금리마저 크게 하락하자 사람들은 은행이외의 적절한 투자처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우리와 상황이 비슷합니다) 실물경제의 착실한 성장과 함께 서서히 투기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죠.

    투기의 시작은 20년대 중반에 일어난 플로리다의 부동산투자열풍이었습니다. 기후가 온난하고 교통이 편리한 플로리다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부동산투자의 적격지로 떠올랐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플로리다에 몰려들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플로리다의 인구는 20%가 늘어났으나 은행예금은 3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돈이 몰리고 마이애미해변의 본격적인 개발에 따라 개발지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크게 올랐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24만달러였던 토지는 1923년에는 80만달러, 곧 이어서는 150만달러에 팔렸습니다.

    경제학자 갈브레이스는 대공황이란 저서에서 휴가로 일광욕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플로리다 반도에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해안은 물론 소택지나 진흙뻘이나 조그만 땅이거나 관계없이 땅이라면 모두가 투자가치를 갖게 되었다라고 소개할 정도.

    당시 플로리다 마이애미지역의 인구는 기껏 75000명에 불과했는데 부동산사무소는 2000여개, 부동산업자만도 25000명에 달했답니다. 심지어는 길거리에서도 매매가 이루어질 정도로 거래는 활기를 띠었다고 합니다. 요즘 떴다방을 연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마이애미해변에서는 팔 집이 아님이라는 표시를 해두어야 부동산을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을 정도로 열광적인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1925년에 들어서 투기로 손쉽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증했습니다. 처음에는 해안선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해변부지가 투자대상이었지만 투기바람이 심해지면서 점차 10마일 그리고 15마일 거리에 있는 땅까지도 투자대상에 포함되어 나갔습니다.

    이런 사태의 와중에 등장한 부동산업자로 찰스 펀디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으로 앞서 투자한 사람에게 배당을 지불한다는 피라미드식 상거래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오늘날에도 피라미드상술을 펀디스킴또는 펀디게임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플로리다에서 습지를 매매하는 부동산업을 시작한 그는 나중에 사기와 절도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찰스 펀디는 투기대상지역이 북쪽으로 넓어지자 잭슨빌근교라는 이름의 분양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잭슨빌근교는 중심가로부터 무려 65마일가량이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맨션분양지의 위치가 개발이 한창 이루어지는 네티시에서 4분의 3마일 떨어져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네티라는 도시는 지도상에 없었습니다. 네티는 외곽지역의 야영지이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지만 분양지의 판매는 순조로웠고 가격은 놀라울 정도로 올라갔습니다.

    1926년이 끝날 무렵부터 투자가치에 비해 지나친 가격상승을 우려한 사람들이 매물을 내놓자 거래는 급증하고, 가격은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기간의 매매이익을 바라고 투자를 했기 때문에 일제히 투기에서 손을 뺐습니다. 그러자 거품은 빠른 속도로 붕괴했고 가격은 크게 폭락했습니다.

    거품붕괴의 직접 원인은 1926년 가을 마이애미에 태풍이 덮쳐 개발지역을 파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플로리다의 토지가격이 휴양지로서의 실제 이용가치를 크게 상회하는 거품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플로리다의 경우 투기가 본격화한 20년대 중반에는 2주 만에 땅값이 두 배나 뛰는 상황까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지 자산가치가 의심스러운 땅의 거래마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설사 땅이 물 속에 잠겨 있어도 계약금 지불 후 바로 팔면 이 익이 남았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투기적 상황에서는 가격이 왜 오르는가라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습니다. 매각차익을 기대하고 땅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투기시장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수요는 충분했고, 땅은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가격상승의 원인은 검토할 필요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휴양지에 대한 실수요였다는 점에서 플로리다지역에 대한 토지투자의 시작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 부동산 붐의 초기에 거래된 땅들은 충분한 투자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토지가격은 본래의 가치로부터 점차 벗어 나갔습니다. 붐의 초기단계에 부동산을 구입한 사람들이 큰 이익을 보자 너도나도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값이 오르니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땅의 실체에서 벗어난 투기적 거래에 몰입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오일쇼크로인한 경제 침체기 후 부동산 버블 사례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오일쇼크로 인해 침체기를 맞았지만 JVC, 소니, 파나소닉, 도요타, 혼다, 캐논과 같은 일본의 전자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차근차근 쌓아올린 기술력으로 그간의 싸구려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미국과 유럽의 경쟁사들을 고사시키며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동차 회사들은 오일쇼크를 역이용해서 기존 미국차보다 기름을 덜먹는다는 점을 널리 홍보하고 잔고장도 미국차보다 적었기 때문에 미국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을때가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의 분석가들이 언젠가 히타치나 소니가 인텔이나 IBM을 인수해버릴 것이다고 전망했을 정도 이 과정에서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해 놓지만 동시에 타국 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진다.

     

    또한 1980년대에 오일 쇼크의 여파가 잦아들었고, 오일쇼크 이래 인위적인 엔저로 일본의 수출이 매년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기업들의 매출이 크게 상승하자 1983년을 기점으로 자산시장이 급속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던 1985년에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올라 일본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 결과 1986년에 -0.5%(달러 기준. 엔화 기준은 +2.8%).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성장률이었으며 달러 기준 마이너스 성장이 기록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갑작스러운 무역환경 악화로 인한 경기둔화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가격은 이 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부동산 시장은 기존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있었기에 더욱 상승했고 이에 따라 기업과 개미들이 재테크로 거금을 벌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투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혹한 기업과 중장년층이 대박을 꿈꾸며 자산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여기에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나서니 투자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광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은 다시 1987년 달러기준 +1.6%(엔화기준 4.1%), 1988년 엔화기준 7.1%, 1989년 엔화기준 5.4%, 1990년 엔화기준 5.6%, 19913.3%(엔화기준)까지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내수경기 부양책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쏠린 결과물이었다는 것. 저금리로 시장에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쏟아졌고, 안 그래도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다시 수많은 기업과 개미들이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점점 더 몰려들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진 나머지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은 집을 구하지 못하고 근교 지역으로 계속 밀려 나갔다. 결과적으로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밀려난 이 사람들은 버블 당시의 낙천적인 국가 분위기만 즐긴 의문의 승리자들이 된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89년에 소비세 신설과 금리 인상이라는 악수를 두게 된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천천히 올려야 할 금리를 너무 급격히 올려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경착륙을 불러왔다.

     

    일본은행은 1988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126.00%까지 올렸다. 23개월만에 3.50%p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 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 200%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만다. 부동산은 거래액수가 매우 큰만큼 LTV의 변동은 구매자 성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담보가치를 130%p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 당연히 담보가치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에는 매수세가 뚝 끊겼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 방에 가버리고 만다.

     

    이후로도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비하게 대처하면서 경기 침체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 가능 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 거품 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쳐오자,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이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면서 견실한 기업들마저 줄도산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1996년까지는 경제성장률이 회복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1998년부터 완전히 마이너스 성장과 0% 성장을 반복하는 고사 상태로 접어든다. 1996년까지는 도산하는 기업이 부동산, 주식 리스크가 컸던 중소형 은행/증권사, 중소 건설업체, 부동산 회사 등에 집중됐으나, 1998년부터는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까지 쓰러지게 된다. 이른바 눈물의 파산선언으로 유명한 일본 3대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1998년 파산),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 탁쇼쿠 은행(1998년 말 파산), 일본장기신용은행(1999년 파산)은 전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사업 손실 때문에 파산했다.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이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댓글 0

Designed by Tistory.